대중문화의 중심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도전 : 플레이브

(출처: MBC 음악중심)
2년쯤 전인가, 처음 ‘플레이브’라는 버추얼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또 이세계 아이돌 같은 거 나왔구나?’라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버추얼 아이돌은 저물어가는 ‘메타버스’ 트렌드의 일각에 불과해 보였고, ‘아담’과 ‘시유’를 비롯해 수많은 버추얼 아이돌들이 ‘세상에 저런 것도 있네’ 정도의 시선을 받으며 마이너리티에 그친 역사를 목격해온 탓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세상 물정 모르고 잘못된 타이밍에 등장한 줄 알았던 그 버추얼 아이돌이 언젠가 아시아 투어를 돌고, 앨범 초동 103만 장을 돌파하며, 공식 유튜브 팔로워 100만 명을 넘길 줄. 2025년 현재, 플레이브는 어엿한 버추얼 아이돌 성공사례가 됐다. 머글 감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라 그런지 언론 매체에는 ‘플레이브의 성공 비결’을 분석한 글이 차고 넘친다.
온라인 라이브를 통한 팬들과의 긴밀한 소통, 플레이브 멤버들의 뛰어난 음악적 실력…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웹툰 덕후 입장에서 흥미로운 포인트는 따로 있다. 바로 플레이브는 전략적으로 ‘웹툰 캐릭터의 모습을 한 아이돌’로 만들어졌다는 것.

(출처: 언리얼 페스트 2023 서울)
“저희는 더 많은 노력을 들이는 만큼 더 넓은 대중에게 가치를 제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선택한 전략이 웹툰 스타일과 K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만화 스타일의 버추얼은 앞선 니지산지와 홀로라이브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 스타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희는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만화 스타일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웹툰이 만화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성을 넓힐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르적인 면에서는 글로벌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K팝으로 대중을 공략해 보기로 했습니다.” (블래스트 이현우 CTO, ‘언리얼 페스트 2023 서울’)
벌써 2년 전 발표인 블래스트 이현우 CTO의 ‘버추얼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의 탄생 과정과 기술 이야기’ 영상은 지금 봐도 흥미롭다. 버추얼 휴먼이 완전히 실사를 추구한다면 아이돌 팬을 타겟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만화 스타일을 추구한다면 경쟁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웹툰+아이돌’의 조합을 선택했다는 블래스트의 시장 분석과 전략이 지금 봐도 스마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웹툰이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만화 스타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묘한 감동이 있다. 포털 한 켠에서 시작한 온라인 스크롤 만화가 이제는 어엿한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니까.
‘웹툰 그림체’의 정체는 무엇인가

(출처: 블래스트)
그런데 잠깐. ‘웹툰 그림체’라는 게 따로 있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자. 만화면 만화고 실사면 실사지, 만화 스타일 중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 스타일’과 ‘웹툰 스타일’이 정말 구분되는 걸까. 놀랍게도 실제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플레이브가 ‘일본 만화 그림체’가 아니라서 거부감이 덜하다는 반응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출처: 왓챠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작품 프로필)
확실히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그림체를 보면 이목구비는 물론 신체 비례도 실제와는 다르게 과장되어 그려져 있어서 플레이브 그림체와는 다른 느낌이다. 소위 ‘모에체’라고도 부르는 이 그림체에서는 얼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고 반짝반짝한 눈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에 비하면 플레이브 멤버들의 눈은 단춧구멍만한 편…이 아니라 현실적인 편. (죄송합니다 십만 플리 여러분 사죄를…)

(출처: 플레이브 공식 유튜브)
물론 플레이브의 그림체에도 2D스러움이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인체 비율은 현실과 비슷하다. 아이돌과 함께하는 ‘챌린지 영상’에서 실제 사람과 한 화면에 들어가도 큰 어색함이 없을 정도다. 이 차이가 바로 대중이 말하는 ‘일본 애니스럽지 않음’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좌) ⟨낢이 사는 이야기⟩, (우) ⟨마음의 소리⟩
사실 모든 웹툰이 반실사 그림체를 선택하는 건 아니다. ⟨낢이 사는 이야기(2004)⟩나 ⟨마음의 소리(2006)⟩처럼 상대적으로 단순한 그림체로 묘사된 일상물이나 개그물도 웹툰의 주류이니까. 오히려 웹툰 초창기에는 이런 ‘만화체’ 웹툰들이 압도적인 주류이자 ‘대중 픽’이었다.

(좌) 외모지상주의, (우) 여신강림
하지만 웹툰 문화가 정착되면서 ⟨삼봉이발소(2006)⟩나 ⟨펫다이어리(2007)⟩처럼 보다 인체 비율을 살린 미려한 작화의 작품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후 ⟨외모지상주의(2014)⟩, ⟨여신강림(2018)⟩ 등이 히트하면서 웹툰 특유의 ‘K-미남미녀’ 묘사에 적합한 매끈한 극화체가 정립되어 갔다. 2022년 보도된 웹툰 업계 노동 실태 기사에서는 극화체가 표준으로 자리잡다 보니 웹툰 작가들의 노동이 더욱 과중해졌다고 분석할 정도였다.
이렇게 웹툰 문화는 대중의 특정 만화 그림체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씩 허물어 갔다. 하필 웹툰을 소비한 주요 계층이 90년대생으로, ‘투니버스’로 호명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성에 익숙한 세대라는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블래스트는 그 변화를 영리하게 포착하고 ‘웹툰 그림체의 아이돌’, 플레이브를 세상에 내놓았다.
2D 껍데기의 3D를 덕질한다는 것
물론 ‘웹툰 그림체’가 아무리 ‘머글’의 진입장벽을 낮춰도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일본 애니메이션’류 그림체에 비해 거부감이 적다는 것이지, 여전히 대다수의 대중에게는 ‘만화 캐릭터’를 아이돌처럼 여기고 팬이 된다는 게 낯선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에게는 모에체든 극화체든 똑같이 X덕이다) 플레이브의 문화적 위치에는 ‘웹툰’의 대중성과 한계가 모두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출처: 블래스트)
이 한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다름아닌 플레이브의 팬덤, ‘플리’들이다. 플레이브가 웹툰과 K팝이라는 전무후무한 조합의 성공작인 만큼, ‘플리’ 역시 '오타쿠'와 '빠순이'라는 유례 없는 구성(?)의 팬덤이다. 문제는 플레이브의 팬 대다수가 플레이브를 ‘아이돌’로 인지하고 자신들을 ‘아이돌 팬’으로 정체화하는 반면, 외부에서는 플레이브를 ‘웹툰 캐릭터’로 인지하다 보니 그 팬덤도 ‘2D 덕후’라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 사회의 ‘오타쿠’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때문에 플레이브의 팬덤은 ‘2D 취급받지 않기 위한 인정투쟁’으로 단결하는 모습을 보인다. 블래스트가 전략적으로 선택한 ‘웹툰 껍데기’가 묘한 지점에서 팬들이 부정하고 싶은 아킬레스건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플레이브❯ 팬덤은 2D 속성을 이유로 아이돌 판에서 다수의 아이돌 팬덤에게 적대시되고 배척당한 집단 경험이 있다. 이에 ❮플레이브❯ 팬덤은 ‘2D로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플레이브❯ 팬덤은 웹툰화와 ‘룩업 피규어’화 이슈에 다른 아이돌의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센 반발을 보였던 바 있다.” (장서홍, ‘버추얼 아이돌 팬덤의 인정투쟁: ❮플레이브❯팬덤의 사례를 중심으로’)

(출처: 낙디(플레이브 작화가) 인스타그램)
블래스트는 플레이브를 기획하면서 만화 팬과 아이돌 팬, 서로 다른 두 부류를 하나로 융합시키려 했다. 그 기획은 지금까지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플레이브라는 버추얼 아이돌은 K팝과 서브컬처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하게 된다. 과연 플레이브는 ‘서브컬처’ 속성을 끌어안고도 이 이상의 인기를 끌 수 있을까?
플레이브 팬들의 영업은 항상 ‘겉보기엔 만화 캐릭터고 오타쿠들만 좋아할 것 같지만 본체들은 알고 보면 열정 넘치는 아이돌’임을 호소하는 스토리텔링으로 이루어진다. 과연 플레이브와 플리의 행보는 ‘웹툰 그림체’를 보다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방향이 될까, 아니면 철저히 ‘극복해야 할 껍데기’로서 언더독 서사의 장치로만 활용하는 방향이 될까. 아마 그 결과가 플레이브 이후 나타날 차세대 ‘버추얼 아이돌’들의 외모를 결정지을 테다.